비디오로 처음 <블레이드 러너>를 보았을 때만 해도 ‘사이버펑크’가 뭔지 몰랐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가 원작인 <블레이드 러너>는 흥행에서 폭망 했지만 이후 ‘저주받는 걸작’으로 추앙되었다. 편집권을 박탈당한 리들리 스코트 대신 영화사에서 마음대로 결말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재발매된 감독판에서는 그 부분을 들어내 러닝타임이 줄어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거쳐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로 순환된다. 또한 <블레이드 러너>가 만들어진 1982년은 사이버펑크의 주 무대인 ‘사이버스페이스’가 전면으로 펼쳐지는 <트론>을 비롯하여 걸작인 존 카펜터의 <괴물>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사이버펑크(cyberpunk)는 1980년대에 등장한 SF의 한 장르다. 60, 70년대 뉴 웨이브와 하드 SF의 귀환을 겪은 SF 소설은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사이버펑크는 인공두뇌학을 말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반항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펑크' (Punk)가 합쳐진 단어다. 이 단어는 브루스 베스키의 단편 『사이버펑크』(1980년)에서 처음 나왔고, 1985년 작가이자 편집자인 가드너 도즈 와가 『연간 SF 걸작선』(The Year's Best SF)의 서문에서 ‘80년대의 작가들 중에서.... 자기주장을 수반한 미학적 유파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예리하고 그로테스크한 하이테크 소설을 쓰며, 때로는 '사이버펑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작가 그룹일 것이다. 여기에는 브루스 스털링, 윌리엄 깁슨, 루이스 샤이너, 그레그 베어 등이 포함된다.’고 말하면서 정착되었다. 윌리엄 깁슨은 <코드명 J>로 영화화된 단편 『Johnny Mnemonic』(1981)을 비롯하여 사이버펑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뉴로맨서』를 1984년에 발표했다. 국내에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카운트 제로』 『아이도루』,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 등이 출간되어 있다.
사이버펑크는 주로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 해커, 사이버스페이스, 정보 독점 등을 다루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간을 닮은 리플리컨트가 만들어진 2019년의 미래가 배경이고,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체하고 ‘전뇌 공간’에 접속하여 모든 정보의 이동이 자유로운 2029년의 근미래를 그린다. 2014년인 지금 보기에는 <블레이드 러너>의 2019년은 물론 <공각기동대>의 2029년도 실현이 불가능해 보인다. 아마도 <블레이드 러너>처럼 대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부익부 빈익빈이 고착된 암울한 디스토피아는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사이버펑크 소설에 흔히 탐정이 등장하는 것은 하드보일드가 그리는 세계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도저히 무너뜨리거나 상처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높은 벽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식이 불가능하거나 넘볼 수 없는 세계. 그런 점에서 사이버펑크는 변주된 영웅 서사로 뻗어나갈 여지가 있다.
사이버펑크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반항적인 태도를 취한다. 대중음악의 펑크가 가장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음악을 자처했던 것처럼, 거대한 기업과 국가에 상처 내는 방식 역시 지배자의 과학과 기술을 뒤틀어서 역전시키는 것이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사이버펑크의 영웅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펑크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반항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거부하고, 그 너머로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SF의 한 경향인 뉴웨이브의 흔적이 사이버펑크에 흐르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 웨이브 SF의 걸작으로 꼽히는 로버트 실버버그의 『두개골의 서』는 애리조나의 수도원에 있다는 ‘구루’를 찾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목적은 영생이다. 그것은 곧 1960년대 히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갈망이기도 했다. 초월. 인간의 감각과 의식을 확장시키고, 제한된 세계를 뛰어넘는 것.
사이버펑크는 인간이 단지 과학과 기술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이고 정서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보여준다. 펑크는 명확한 이론을 제시하는 대신 몸으로 부딪친다. 사이버펑크도 마찬가지다. 사이버펑크에서 ‘초월’이란 개념은 무척 중요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를 혐오하던 데커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리플리컨트인 여인을 사랑하고, 심지어는 그 자신도 리플리컨트일 수도 있다. 인간이지만, 현재의 인간을 뛰어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체제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세계 자체를 바꾸는 시도다.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는 전신 의체화이고, 바트는 전신이 기계다. 인간의 몸을 기계로 바꾸는 것은, 인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것이다. 파워 슈트나 모빌 슈트까지도 일종의 육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에 갇힌 인간은 기계를 이용하여 초월이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 없는 인간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인형사라는 해커를 추적하면서 쿠사나기는 의심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를 나로서 인식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것을 기억하기 때문인데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내 기억은 과연 사실일까? 의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시도는 과거에 종교, 명상, 약물 등을 통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LSD가 합성되었을 때, 미국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직접 LSD를 복용하며 실험을 했다. 인간의 감각, 의식이 어떻게 변형되거나 확장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장면에서 쿠사나기는 육체를 버리고 전뇌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실재’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서 말하듯, 이미 죽은 철학자의 정보가 온라인에 무수하게 존재하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총합’으로서 그를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인공 지능이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육체란 과연 무엇일까? 아니 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인간과 다른 유일한 하나는 과연 ‘영혼’일까? 그렇다면 영혼을 가진 인간은 왜 타락하는가.
1980년대와 달리 사이버펑크의 질문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대로 겹친다. 이미 우리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상의 존재와 사랑하거나 인간적 교류를 나누는 것이 이미 가능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정보를 모으고, 지켜보는 시스템은 과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인가, 구속할 것인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내다본 미래는 이제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다. http://ch.yes24.com/article/view/25923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 시대가 올해인 2019년입니다. 영화를 만든 시기에는 꽤 멀게 느껴졌던 시간인가 보군요. ㅎㅎ
본론으로 들어가서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이 사이버 펑크의 모습으로 보여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는데 그 사진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보는 우리도 여기가 한국인가 싶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그 모습, 그 장면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네요. 전에부터 올리고 싶었던 사진을 이제 올리게 되었군요. 멋진 사진작품 지금부터 감상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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